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레타 가르보 (문단 편집) == 은퇴 후 == 가르보는 출연료를 영리하게 투자를 한 것이 대박이 터져서 은퇴 후 평생을 윤택하고 편안하게 살았다. '로데오 드라이브'가 번화가가 되기 전에 [[부동산]]을 사뒀고 [[주식]]에도 소질이 있었다. 사망 전까지도 부동산과 주식을 성공적으로 관리했다. 이스트 강이 내다보이는 [[맨해튼]] 건물의 5층을 통째로 차지하고 방 7개짜리 집에서 혼자 지냈다. 수위들이 사생활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늘 호위해주었다. 같은 건물의 이웃들은 암묵적 규칙에 따라 가르보랑 얼굴이 마주치면 못 본 척을 해야했다. 그래서 이웃들 사이에서 호칭이 '그 얼굴(The Face)'이었다. 별칭이 원래 의도한 의미와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이다. 그래도 살던 건물의 직원들이 전부 파업했을 땐 이웃들을 위해 직접 [[승강기]]를 운행하기도 했다고 한다. 집에는 [[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]]의 그림과 18세기 프랑스 고가구들이 잔뜩 있었다. 매일 실컷 늦잠을 자고 집안일은 전혀 손대지 않았고 요리도 한 번 하는 법 없이 고급 북유럽 요리 전문점 뉘보르 넬슨[* Nyborg Nelson. 한때 [[뉴욕]]의 명물이었다.]에서 배달만 시켜먹었다. [[커피]] 내리는 것조차 번거로워했다. 인생을 [[귀차니즘]]으로 살았던 것이다.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고 통화하는 것도 성가셔서 몇 주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그러다가도 얼마 없는 친구들을 만나 밥이 먹고 싶을 때면 특정 장소에 쪽지를 두곤 했다. [[밴 존슨]]의 경우엔 공원의 나무였다. 사람들이 못 알아보도록 [[페도라]] 모자를 쓰고 [[스카프]]와 [[선글라스]]를 상시 착용하긴 했어도[* 특유의 귀찮아하는 성미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이 원칙은 차차 폐기되었다.] 매일 외출했다. 혼자 돌아다니는 게 불안할 땐 친구나 연인을 경호원처럼 대동하고 다녔다고 한다. 상가에서 물건을 둘러보고 가명으로 화랑에 전시 구경을 다니고 해외를 수시로 왔다갔다 했다. 휴가용 저택이 있던 [[스위스]] 클로스터스(Klosters)에 갈 땐 가장 좋아하는 감독 [[클래런스 브라운]]의 성을 딴 해리엇 브라운(Harriet Brown)이란 가명을 썼다. 그럼에도 알아채는 사람들이 당연히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시치미를 뚝 뗐다. 사람을 안 좋아하고 은둔을 추구했지만, 그런 것 치곤 상당히 활달한 삶을 살았고 덕분에 이렇게 은퇴 이후의 개인적 삶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이 풍성하게 남았다. 한국에선 가르보가 꽃을 키운 것을 두고 소박한 소일거리였겠거니 오해하고 있지만 가르보는 아예 [[캘리포니아]]에 큰 장미 정원을 두고 있었고 겨울만 그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. 즉 '''"야채와 꽃을 키웠다"''' 는 언급은 본인이 직접 텃밭 같은 걸 가꿨다는 소리가 아니다. 그냥 일꾼들을 사서 정원 손질을 시킨 것이다. '''[[귀차니즘|애초에 뭘 하는 게 너무 싫고 귀찮아서 은퇴한 사람이다.]]''' [[제2차 세계 대전]] 때 [[스톡홀름]]에서 영국군이 고위급 [[나치]] 동조자들을 색출하는 데 협조했다는 군 관계자들의 주장이 있다. 영국 첩보원들을 서로 연계해주고 쪽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는 말도 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20221130_172411.jpg|width=100%]]}}}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20221130_172358.jpg|width=100%]]}}} || ||<-2> 1951년에 찍은 [[증명사진]]. 다음해 [[하퍼스 바자]]에 실렸다. || 1950년경 [[리처드 버튼]]은 20명 정도가 모인 작은 할리우드 모임에서 가르보를 만나 대화까지 나눴는데 가르보라는 걸 못 알아차린 적이 있다. 마흔 정도라 짐작되는[* 실제론 40대 중반이었다.] 품격이 있어 보이는 여성이 농담으로 꽤 야한 얘기들을 꺼내서 놀랐다고 한다. 다른 동료 배우들도 "가르보가 저속한 얘기를 잘했다" 라고 말한 바 있다. 1954년에 "잊을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연기"를 펼쳤다는 찬사와 함께 [[아카데미상|아카데미]]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. 1955년부터는 사인하는 것도 그만 두고, 초연 행사에도 안 가고, [[백악관]] 초대도 거부했다. 그러나 동시에 친구에게 "사람들이 내가 여기서 지내는 걸 알게 하는 게 싫기" 때문에 고집하고 있는 삶의 방식 때문에 "죄수"가 된 것 같다고 편지하기도 했다. 서신들을 보면 본인도 이렇게 죽을 때까지 아무 것도 안 하고 살아도 되나 고민은 했던 모양이다. [[귀차니즘|그렇지만 언제나 결론은 "귀찮다"로 끝났다.]] 유일하게 열심히 한 건 운동이었다. 집에서 [[요가]]를 열정적으로 했고 50대에도 옆으로 재주를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. 한참 운전을 해야 갈 수 있는 친구 집에서 [[테니스]] 시합을 하기도 했다. 60대엔 [[우울증]]을 앓아서 이웃의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단조로운 삶을 지겨워하면서도 사회 불안장애와 군중에 대한 공포가 심해져 사람을 더 기피하게 됐던 모양이다. 1980년대에 가르보와 두 번 인터뷰 했던 에드워드 로지[* Edward Lozzi. 언론인. 홍보 회사도 운영하는데 로지를 고용했던 고객 중엔 [[존 보이트]], [[자자 가보]] 등이 있다. [[슈퍼맨의 저주#s-2.3|조지 리브스]]의 사망과 관련한 증언도 유명하다.]에 의하면 흡연과 단음식([[초콜렛]]칩 쿠키)과 꽤 심한 음주(스톨리치나야 보드카[* Stolichnaya. [[밀]]과 [[호밀]]을 재료로 하며, [[소련]]에서 생산되던 브랜드. 소련 붕괴 후 [[룩셈부르크]]의 주류회사 SPI Group에서 Stoli라는 이름으로 판매 중이다.]와 커티 사크 스카치[* Cutty Sark scotch. [[싱글 몰트 위스키#s-4.1.1|글렌로씨스]]. 이름의 커티 사크는 현재 유일하게 전해져와 박물관에 전시 중인 쾌속 범선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, [[스웨덴]] 화가 칼 조지 오고스트 발린(Carl Georg August Wallin)이 그렸던 이 배의 그림이 라벨에 나와있다. 현재 프랑스 주류회사 라 마르티니케즈(La Martiniquaise)에서 생산 중이다.])를 상당히 즐겼다고 한다. 말년엔 [[지팡이]]에 의지해야했고, [[심장]]과 [[콩팥]] 문제로 일주일에 세 번씩 [[투석]]을 받았다. 1990년에 84세로 맨해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골은 [[스웨덴]]에 있다. 조카가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정 받았는데 그 조카도 2017년 사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